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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만 주교의 성모님 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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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해욱프란치스코 작성일13-11-09 11:27 조회7,19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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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만 주교의 성모님 이야기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이번 호부터 독자들에게 올바른 성모신심을 심어주기 위해 조규만(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주교가 평화방송을 통해 강의하는 성모님 이야기를 정리, 게재한다. 조 주교는 저서 「마리아, 은총의 어머니」(가톨릭대학교출판부)를 바탕으로 마리아 교의와 공경의 역사를 풀어나간다. 평화방송 라디오(FM105.3MHz)는 25일 오후 6시부터, TV(SKY-413)는 5월 중순부터 '조규만 주교의 성모님 이야기'를 방송한다.
 
 
(1) 성모님 향한 남다른 사랑
 
가톨릭교회는 왜 성모님을 공경하고 있으며, 얼마나 성모님을 공경할까.
 
교회 전례력을 보면 성모님에 관한 성월이 많다. 5월은 성모 성월, 10월은 묵주기도 성월, 1년 중 두달이 성모님과 관련된 성월이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마리아 공경」이라는 권고에서 "그리스도 다음으로 가장 높고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시는 그 분의 위치를 분명하게 드러내야 하는 원칙을 따르고 있다"(28항)고 밝혔다.
 
성모님에 대한 교회의 공경은 사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2000년 역사라 해도 틀리지 않다. 복음서들이 초기교회 그리스도 공동체가 어떻게 성모님을 공경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9장을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아래 요한과 사랑하는 제자, 그의 어머니가 함께 있었다. (예수는) "이는 내 사랑하는 어머니이시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때부터 요한은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셨다고 했다.
 
로마 카타콤바에 가면 2000년 전에 그려진 성모님 그림을 벽화로 볼 수 있다. 그 시대에도 성모님에 대한 공경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도 성모공경은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순교자들은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굉장히 강했다. 묵주기도를 바치는 매괴회가 설립돼 있었고, 교우들이 자신을 성모님의 종으로 바치고 특별한 보호를 구하는 성의회도 초창기에 설립됐다.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회 수호성인으로 정해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했을 때,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41년 8월 22일 성 요셉과 함께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구의 수호성인으로 승인해 주셨다. 이전까지 수호성인은 요셉이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도 성모신심이 남달랐다. 신부님이 당신 스승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라파엘호를 타고 중국으로 가다 풍랑을 만났지만 성모님께 전구해 살아남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1846년 우리나라에는 성모성심회가 설립된다. 1898년 명동성당이 원죄 없이 잉태된 성모님을 수호자로 성모님께 봉헌된다. 1953년 3월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인 푸른 군대가 우리나라에 진출했고, 그해 5월 레지오 마리애가 우리나라에 들어온다. 1954년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선포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다시 성모님께 봉헌된다. [평화신문, 2010년 4월 25일, 정리=이지혜 기자]
 
 
(2) 성모님 공경, 다 이유가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활동하는 남녀 수도회를 보면 성모님과 관련된 수도회가 많다. 마리스타 교육 수도회, 노틀담 수녀회, 로사리오 성모 도미니코 수도회, 마리아 수녀회, 마리아의 딸 수녀회, 메리놀 수녀회,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수도회 명칭을 통해 가톨릭 신자들이 성모님을 얼마만큼 존경하고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가톨릭교회가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이유가 뭘까.
 
교황 바오로 6세는 교황권고 「마리아 공경」에서 말씀하신다.
 
"마리아 공경이 거룩한 예배에서 매우 숭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예배는 하느님 백성이 수행해야 할 첫째가는 과업입니다. 교회가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흠숭하고 하느님의 모친 복되신 마리아를 비범한 애정으로 공경하며 순교자 및 다른 성인들을 경건하게 기념하는 이 전례를 보다 합당하게 부흥시키기 위해 본인은 앞으로 열과 성을 다할 것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신심이 발전되기를 바라는 이유는 이 신심이 교회의 참된 신심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는 하느님 흠숭과 성인 공경을 구분한다. 하느님에게는 흠숭지례(欽崇之禮)를, 성모님에게는 상경지례(上敬之禮), 성인에게는 공경지례(恭敬之禮)로 구분한다. 흠숭과 상경, 공경을 어떻게 구분할까. 개신교 신자들이 볼 때 하느님을 흠숭하고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잘 구별되지 않아 천주교를 '마리아교'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교리서에서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과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을 분명히 구별한다. 우리는 하느님께 "이렇게 해주십시오"하고 청한다. 그러나 성모님과 성인에게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한다. 우리는 성모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성모님과 성인이 우리를 위해 기도를 전구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신자 중에 성모님 공경이 지나쳐 오히려 하느님보다 성모님을 더 신뢰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훌륭한 어른을 공경하는 일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상숭배처럼 성모님을 신성화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해야 하는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많은 신자들이 성모님을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는 신학적 용어로, 센수스 피델리움(Sensus fidelium)이라고 하는데, 신자들의 신앙감을 말한다. 신학적 근거로서 교회 전통과 이성적 논리가 있지만 신자들의 느낌도 신학적 근거가 된다. 모든 신자들이 느끼는 것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은 당연하다.
 
셋째, 성지 중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성모님의 태중이야말로 예수님이 지나간 흔적이자, 성지이다.
 
넷째, 성모님은 모범적인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성모님만큼 당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은 없다.
 
마지막으로 성모님을 공경하는 일이 옳다는 것을 성경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신문, 2010년 5월 2일, 정리=이지혜 기자]
 
 
(3) 성모님께 맞는 공경 드려야
 
개신교는 왜 그토록 성모 마리아 공경을 반대하는지, 가톨릭과는 개신교는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개신교는 교파가 많다. 가톨릭을 보는 개신교의 시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가톨릭은 이단이며, 그리스도교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보수적 정통 개신교가 그렇다. 두 번째는 가톨릭이 개신교와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단으로 볼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세 번째는 가톨릭은 이단이 아닐 뿐 아니라 개신교와 형제지간이며, 큰집이나 마찬가지라고 보는 관점이다.
 
보수적 개신교단이 가톨릭을 이단시하는 것은 가톨릭이 개신교와 다른 신을 믿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신격화하고 숭배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없는 교리를 가톨릭이 임의로 만들었다는 비판이다. 개신교는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 천주의 모친성, 승천설, 원죄 없는 잉태 모두를 부정한다. 가톨릭이 성경과 성전(聖傳)을 인정하는 반면 개신교는 성경만을 인정하기에 이교리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따라서 개신교가 보기에 마리아 공경은 우상숭배일 뿐이다.
 
가톨릭교회가 마리아와 관련된 교리를 선포하는 데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431년 에페소공의회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선포했다. 마리아가 여신이어서가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하느님이기에 그리스도를 낳은 분은 당연히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후 1500여 년이 지난 1854년 교회는 성모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하심을, 1950년에는 성모 마리아께서 승천하셨음을 교리로 선포했다. 이처럼 마리아 관련 교리는 하루 아침에 확립된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논쟁을 거친 결과이다.
 
우리가 마리아를 공경한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리아의 옷자락으로 가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다. 성모 마리아를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격화해서도 안 된다. 동방박사가 예물을 드린 분은 아기 예수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성모 마리아가 공경을 받는 것은 동정녀라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동정으로 치자면 수도자들 모두가 동정이다. 또 단순히 죄 없는 삶을 살고, 승천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고 반문하면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하고 말씀하셨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것은 예수를 낳은 것도 낳은 것이지만 하느님 말씀을 듣고 온전히 따르는 신앙의 모범을 보인 분이기 때문이다. 몸으로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어머니셨다.
 
마리아는 당신 자신만 순종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예수께서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씀하셨다. 자신도 순종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순종하도록 이끄는 입장에 선 것이다. 모세가 하느님 말씀을 듣고 따르면서 백성들에게 하느님께 복종하라고 가르친 것처럼 성모 마리아도 먼저 순종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순종할 것을 가르쳤다.
 
성모님은 돌에 맞아 죽을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하느님 말씀에 순종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한 후에는 제자들과 마음을 모아 기도에 힘썼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순간부터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그리고 돌아가신 후에도 하느님께 충실한 삶을 살았다. 성모님이야말로 일생에 단 한 번도 은총을 잃지 않았다. 마리아는 승천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미래를 보여줬다. [평화신문, 2010년 5월 16일, 정리=남정률 기자]
 
 
(4) 옳지 않은 사적 계시에 현혹되면 안돼
 
잘못된 성모신심과 올바른 성모공경에 대해 얘기하겠다. 우선 사적 계시를 중심으로 빗나간 성모신심 사례가 있다. 주로 탈혼 상태에서 하느님을 봤다든가, 성모를 만났다든가, 천당에 갔다왔다는 얘기 등이다.
 
그런 환시가 1950년대에 상주에서 일어난 적이 있다. 당시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는 조사를 한 뒤 "상주 황 데레사의 사적계시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고 공식 선언을 했다. 그게 1957년 1월 15일에서 21일 사이에 조사를 해서 발표한 건데, 그 이전인 1954년, 1955년에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 서정길 대주교께서 금지한 사항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었다. 1997년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에서 펴낸 「건전한 신앙생활을 해치는 운동과 흐름들」이라는 책자에서도 상주 황 데레사가 잘못된 사적 계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지적을 한 적이 있다.
 
신비 체험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하지만 하느님과 만남을 통해 얻게 된 메시지를 어떻게 전해주느냐는 별개 문제다. 가령 토마스 데 아퀴노 같은 대학자 성인께서도 「신학대전」을 집필하던 중에 하느님을 체험했는데 그 이후엔 집필을 포기했다. 그래서 「신학대전」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 이유는 토마스 데 아퀴노같은 대석학도 하느님을 만난 뒤에 그 체험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계시와 진리, 신비에 대해서 인간 이성으로 남김 없이 다 알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는 계시를 통해 알려주신다고 가르친다. 그 계시에는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가 있다. 공적 계시는 교회가 모두 승인할 수 있는 성경과 예언자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사적 계시는 한정된 지역에서 특별한 상황에 새롭게 무엇인가를 강조하기 위해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사적 계시는 항상 공적 계시의 내용에 부합할 때만 정당하다. 공적 계시를 사적 계시가 보충해야 한다거나, 공적 계시를 수정하기 위해 사적 계시가 있어야 된다는 주장을 교회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사적 계시가 올바른지 판별해야 한다.
 
또 기적이나 사적계시를 성역화시키는 성모신심으로 나주 윤 율리아 사례가 있다. 나주 윤 율리아가 모시는 성모상이 1985년 6월 30일부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1991년 5월 16일부터 2002년까지 21차례에 걸쳐 이 사적 계시의 절정을 이루는 성체 기적 현상이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에 당시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는 1998년 1월 공지문을 통해, 또 2001년 5월 당시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도 '나주 윤율리아와 그 관련된 상황들에 대한 교구의 입장' 발표를 통해 자칭 '성모동산'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행해지는 모든 집회와 의식은 가톨릭 신앙행위와는 무관한 것임을 재확인했다.
 
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베이사이드 성모 발현, 일명 미카엘회라는 운동도 있는데 이 또한 그 신빙성이 희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최근 우리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 중에 '가계치유를 위한 기도모임'이 있는데, 이 가계치유에도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사적 계시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왜 성모 마리아께서 발현하셨는지를 묻는 일이다. 발현에서, 사적 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지의 내용이다. 메시지가 계시나 진리, 교회 교리에 위배되면 그것은 올바른 발현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성모 마리아의 메시지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신문, 2010년 5월 23일, 정리=오세택 기자]
 
 
(5) 구약에 드러나는 성모 마리아 신비
 
오늘은 구약성경과 성모 마리아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성모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마리아를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알아야 한다. 신약에도 마리아와 관계된 이야기가 많지 않지만 구약에는 마리아가 하느님 구원 계획 안에 깊이 감춰져 있어 마리아라는 이름을 직접 거론하는 구절은 없다.
 
하지만 구약에서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나오고 그 메시아를 낳은 어머니에 관한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구약에서 성모님과 관련된 내용은 창세기 3장 15절에 잘 나와 있는데, 이를 원복음, 최초의 기쁜소식이라 한다.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추방되지만 그들을 타락시킨 뱀은 여인의 후손에게 머리를 짓밟힐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인은 즉 하와, 마리아를 암시하며,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후에 교부들은 아담과 하와로 인해 하느님과 멀어진 관계를 순명의 모습을 보이신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가 되돌리는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났을 때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같은 말을 했다. 하느님에 대한 두 분의 순명이 아담과 하와가 틀어놓은 역사를 되돌린 것이다.
 
이사야서 7장 14절도 한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고 그 탄생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고 예고한다. 많은 학자들은 이를 성모와 메시아 탄생 예언으로 본다. 예언은 말한 이가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하는 것도 가능하다. 예수님을 체포한 가야파는 "민족을 위해 한 사람이 희생되는 게 잘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사가는 이를 예수님 한 분으로 온 세상이 구원된다는 예언으로 해석하지만 가야파는 뜻을 모르고 예언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려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고 십자가에 쓴 글도 그대로 이뤄졌다.
 
미카서 5장 1절에는 메시아 탄생이 더욱 구체적으로 나온다. 베들레헴 한 여인으로부터 메시아가 태어난다고 하는 예언은 앞의 이사야 예언에 대한 응답이다. 또 베들레헴의 옛 지명인 시온은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며 이들은 오랜 바빌론에서의 노예생활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데 이바지한 이들이다.
 
이들은 타국에서의 고된 생활에도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끝까지 지키며 우리나라 선비처럼 청빈하게 산 사람이다. 현지 문화에 타협하지 않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가난한 삶을 택했다.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라는 마태오복음 말씀은 바로 시온 사람을 지칭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가난한 사람의 참 뜻은 돈과 명예보다 하느님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메시아를 잉태하고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마리아는 시온의 딸의 전형이며 또 다른 모습으로는 교회가 세상을 다시 재건하게 될 모델이 될 수 있다.
 
구약에는 이 밖에도 마리아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구절이 많다. 마리아의 동정성을 나타내는 '불타는 가시덤불'이나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계약의 궤' 역시 그 중 하나다. 마리아야말로 하느님의 아들을 모셨던 썩지 않은 계약의 궤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구약에는 마리아의 이름이 분명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메시아 탄생과 그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언급하는 구절들을 볼 수 있다. 감춰져 있던 성모 마리아의 신비가 점차 드러나는 것이다. [평화신문, 2010년 5월 30일, 정리=백영민 기자]
 
 
(6) 신약성경에서 드러나는 성모님의 역할
 
바오로 사도가 바오로 서간에서 성모님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찾기 쉽지 않다.
 
"그러나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4,4-5).
 
바오로 사도가 성모님에 대해 암시적으로 표현한 부분이다. 마리아라는 이름도 없고, '여인에게서 태어났다'는 이 한마디 말뿐이다.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심을, 여인으로부터 태어나셨다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인에게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한 인간의 어떤 나약성을 지닌 인성을 말한다. 하느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여인에게서 태어나 우리와 똑같은 나약함을 지닌 존재가 되셨다는 점이다. 참된 인성을 지니게 됐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여인으로부터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많은 신학자들은 바오로 사도의 성모님에 관한 모든 신학적 진술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고 언급한다. 교부 바실리오는 하느님의 아들이 성모님을 통해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 성모님으로부터 인성을 얻게 됐다는 '~를 통하여'(from)라는 전치사가 중요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 탄생과 관련해 필리피서 2장 6-11절을 들 수 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중략)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에서 '종의 모습'이라는 표현을 통해 마니피캇(성모님의 노래)에선 여종으로 표현한다.
 
바오로 사도는 글에서 성모님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에게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은 예수가 인간이 되는데 성모님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바오로 사도에게 마리아의 동정이나 교회가 발전시킨 마리아에 관한 언급은 찾아 볼 수 없지만, 적어도 예수님 강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성모 마리아에 관한 신비가 출발점으로 제시되고 있다.
 
네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인 마르코 복음 안에도 성모님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먼저, 성모님과 친척들이 군중과 이야기하는 예수님을 붙잡으러 가는 이야기다.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0-21).
 
여기는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없지만 예수님의 친척이 언급된다.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중략)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셨다. (중략)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1-35).
 
이 대목에서 개신교 신학자들은 예수님도 당신 어머니와 형제들을 배척했는데 가톨릭에서는 왜 성모님을 공경하냐는 입장을 보인다. 그러나 이 대목이야말로 예수님이 당신 어머니가 자신을 낳은 어머니일 뿐 아니라, 어머니야말로 하느님 뜻을 행한 분으로서 "내 어머니다"고 하는 것을 반어법으로 말한다.
 
이 세상 어떤 여성도 하느님 말씀 듣고 따라도 예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인 마리아 외에는 없다. 예수님의 "누가 내 어머니이냐?"는 말은 당신 어머니를 겨냥해 드러내는 말씀이다. 철저히 성모 마리아를 위해서 사용된 언어다. [평화신문, 2010년 6월 6일, 정리=이지혜 기자]
 
 
(7) 예수님 뒤에는 항상 성모 마리아가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마르 6,1-6).
 
이처럼 예수님은 고향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다른 말씀과 비교해보면 마태오복음 13장에는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는 표현이 있다. 루카복음에는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마르코복음은 왜 '그 목수가 아닌가?'라고 했을까? 마르코복음에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없다. 요셉의 아들 혹은 목수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려면 그 앞에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설명하는 대목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 어린 시절 언급이 없기 때문에 바로 목수로 불린 것이다.
 
예수님의 형제들로 표기된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마리아의 자녀들인지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학자들 간에도 여러가지 설명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명단이 마리아의 자녀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요셉의 전처 소생들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형제들이라는 단어가 굳이 친형제만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배다른 형제거나 사촌지간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형제들이 마리아의 자녀라고 불리워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예수님 유년기에 형제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도 이상하다. 또 이 4명 형제들 가운데 야고보와 요셉은 다른 마리아의 아들로 나타나고 있다. 가령 마르코복음 15장에는 "그들 가운데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라고 적혀 있다.
 
마태오복음은 마르코복음보다 마리아에 대해 더 많이 다루고 있다. 특히 예수님 유년기를 이야기하면서 그와 관련된 마리아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태오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한 증언자로 마리아를 내세운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관련된 마리아, 예수님의 공생활과 관련된 마리아로 나타난다.
 
제일 먼저 마태오복음 1장 1-18절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온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을 낳고…(중략)". 이 족보를 가만히 보면 아주 재미있는 점이 발견된다. 여성의 이름이 거론된다는 것이다. 당시가 남성 중심 사회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여자들이 거론된 것은 매우 주목할만하다.
 
이 족보에는 타말, 라합, 룻, 바세바 등 여성 4명이 나타난다. 학자들 간에 왜 이런 여인들 이름이 나오는지 논란이 있었다. 이들 여성의 공통점을 죄녀라고 꼽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마리아와 무슨 관계인가? 이들은 모두 비정상적인 결혼생활을 영위했다. 많은 학자들은 정상적인 이스라엘 여성들(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이사악의 아내 리브라 등)도 많은데, 왜 이방인이 포함된 이런 이들의 이름이 족보에 올라왔는지 의아해한다.
 
이는 하느님이 어떤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느님 뜻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의 경우 선택권이 상대 조건에 따라 바뀐다. 상대가 멋있는지, 예쁜지 등 조건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지만 하느님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사랑하신다. 실제로 예수님이 제자를 선발한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마태오복음 1장 18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라며 예수님 탄생을 다루고 있다. 성모님의 잉태는 성령에 의한 것이다.
 
마태오복음 1장 1-12절을 보면 동방박사의 방문이 나와 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라고 표현돼 있다. 또 마태오복음 2장 13-23절에는 "아기와 아기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알려줄 때까지 거기 있어라"고 나와 있다. 요셉의 아들이라는 표현 대신 아기와 아기의 어머니로 표현된다.
 
또 마태오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 항상 뒤에 머물던 마리아를 보여준다.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을 앞에 두고 뒤에 머물러 계신다. 마태오복음은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평화신문, 2010년 6월 13일, 정리=이서연 기자]
 
 
(8) 루카 복음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알려주는 복음서는 루카와 마태오복음이다. 두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어린 시절 이야기는 공통된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 마태오복음은 복음서를 쓴 마태오가 가부장적 전통이 강한 유다인이었던 까닭에 다분히 남성 중심이다. 따라서 마리아보다는 요셉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 의사였던 루카가 쓴 루카복음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의 증언자로 드러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느님 아들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이들은 사도들이다. 그들은 부활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하느님 아들임을 결정적으로 깨달았다. 이는 예수님 공생활 이후 이야기다. 아기 예수가 하느님 아들임을 증언하는 이는 다름 아닌 마리아다.
 
예수님 탄생과 관련해 루카복음과 마태오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마리아와 요셉은 둘 다 나자렛 출신으로 약혼한 사이며, 요셉은 다윗 가문의 후손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했으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출생했다는 사실 등이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 잉태를 알려주는 루카복음 1장 26-38절은 마리아가 어떤 분인지를 잘 알려주는 굉장히 중요한 자료다. 특히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는 인류 역사를 바꾼 장면이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실 때 아버지 하느님께 바쳤던 기도, 즉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와 꼭 닮았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하라는 것이다. 마리아와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해 바뀐 역사를 다시 되돌려 놓았다.
 
루카는 복음서에서 요한 세례자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을 은근히 비교한다. 물론 둘 다 기적적 탄생이다. 다만 요한 세례자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늙은 엘리사벳이 잉태한 반면 예수님은 동정인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 어느 것이 더 기적적일까. 또 요한 세례자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하느님이 보낸 천사의 말을 의심하고 벙어리가 됐지만 마리아는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다시 말해 마리아의 믿음이 즈카르야보다 훨씬 더 깊다는 것을 암암리에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께 대한 마리아의 순종은 목숨을 걸고 받아들인 신앙이다. 마리아 당시 처녀가 애를 갖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일이었다. 지금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를 받아들였다.
 
동정 잉태라는 기적이 말하는 핵심은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잉태할 수 있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또 아무리 하느님이라고 해도 죽어서 흙먼지로 돌아간 이들을 어떻게 부활시킬 수 있냐고 묻는다. 동정 잉태나 부활 모두 신화라는 주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인들은 하느님은 할 수 없어도 생명공학은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남성의 정자 없이 잉태시키는 처녀생식 기술이 그런 예에 속한다. 하느님이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한꺼번에 다 들을 수 있겠냐고 반문한다. 첨단기술인 네비게이션 시스템은 인공위성을 통해 모든 차량에게 갈 길을 동시에 알려준다. 첨단과학은 할 수 있어도 하느님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하느님은 첨단과학을 뛰어넘는 분이다. 결론적으로 동정 잉태가 말하고자 하는 초점은 인간에겐 불가능한 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루카복음 1장 39-45절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장면이다. 루카는 여기서 우리가 마리아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다고 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뤄지리라고 믿은 분이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1,28)라고 했다. 가브리엘 천사와 엘리사벳이 한 말에 나타난 의미만으로도 마리아는 공경을 받는 데 부족함이 없다.
 
우리는 어려움이 닥치면 기도를 한다. 내 뜻을 이루고자 하는 기도가 많다. 그러나 기도는 내 뜻이 아닌 하느님 뜻대로 해달라는 것이어야 한다. 하느님 뜻이 더 나은 해답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하느님께서 내 뜻을 이루도록 도와달라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대로 해달라는 것이어야 한다. 마리아가 그랬다. 돌에 맞아 죽어도 상관 없으니 하느님 뜻대로 하라고 했다. 그것이 신앙이다.
 
루카복음에 나타난 마리아는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오도록 하는 데 필요한 신앙의 자세를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루카복음 1장은 마리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자료이자 마리아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는 성서적 근거다. [평화신문, 2010년 6월 20일, 정리=남정률 기자]
 
 
(9) 루카 복음에서의 성모님: 마리아의 노래와 예수님 탄생
 
우리는 루카복음에서 마니피캇(Magnificat), 곧 마리아의 노래(루카 1,46~55)를 들을 수 있다. 마리아 노래가 과연 성모님이 지은 것인지 여부는 학자들마다 논란이 분분하지만, 마리아 노래는 구약의 사무엘 상권에 나타나는 사무엘 어머니 한나가 부르는 '한나의 노래'(1사무 2,1-10)와 닮아 있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노래'(루카 1,68-79)와도 비교해 볼 수 있다.
 
이 노래에서 우리는 성모님의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정말 하느님 때문에 떨리고 설렌 적이 있는가,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을 간절히 원하고 찬미하고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나 싶다. 그렇지만 성모님은 하느님 때문에 마음속에 늘 설렘을 갖고 살았다.
 
구원은 불행한 상황에서 역전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마리아 노래는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노래'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여기에 '보잘것없는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곧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 아나빔(anavim)을 뜻한다.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서 저자는 산상설교를 통해 각각 '마음이 가난한 사람', '가난한 사람'이라는 단어를 썼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나빔'이라는 표현을 썼다. 아나빔은 게을러서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통을 지키고자 다른 나라 문화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실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재물에 대해 초연할 수 있었던 마음이나 자세에 있다. 재물도, 권력도, 재주도 없고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라고는 오로지 하느님밖에 없다는 믿음의 사람, 맘몬 곧 재물보다는 하느님을 선택하는 사람이 바로 아나빔이다. 어쨌든 마리아의 노래는 불행한 처지에서 역전되는 구원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또 베들레헴에서 예수님 탄생(루카 2,1-7)을 보게 된다. 베들레헴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열두 부족에게 땅을 분배할 때 유다 부족이 갖게 된 땅이어서, 유다 출신들은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 등록을 해야 했다. 루카복음 사가는 특이하게 등록 당시 아우구스투스 황제나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15년라는 표현을 등장시켜 세계사적 연대기 안에서 하느님 구원 계획과 구원사를 바라보려고 한다.
 
이어 천사가 목동들에게 예수님 탄생을 알리고 뵙는 목동들의 경배(루카 2,8-20)가 나온다. 목동들 경배에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라는 천사들의 찬미가 나온다. 그렇다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방법은 뭘까.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을 반듯하게 살 때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다.
 
또 예수님은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하셨다. 평화는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할아버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 풍랑 이는 바다에 뜬 배 안에서 주무시는 예수님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모습을 본받을 수 있었으면 한다. 폭풍이 이는 바다에 떠 흔들리는 배 안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는 이유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우리를 평화롭게 해준다.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내어맡기는 믿음 안에서만 이를 수 있는 평화다.
 
루카복음 2장 21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할례와 작명을 보게 된다. 신약에 등장하는 요한 세례자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또한 이름이 지어져 있었다.
 
이어 성모님은 요셉과 함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한다(루카 2,22-24). 성모님은 모세나 주님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다. 성모님은 정결례나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제물로 바치라는 주님의 율법에 그대로 따랐다.
 
시메온의 예언(루카 2,25-35)은 예수님이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 곧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성모님이 칼에 찔리는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대목이다. 이는 성모님 역시 신앙의 어두움을 겪게 된다는 것을 예언하는 것이기도 하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예언이기도 하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함께 고통과 고난의 길을 겪었다. 성모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누구보다 그리스도를 따른 분이었다. 또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낸 한나도 예언을 통해 아기 예수에 대해 이야기한다. [평화신문, 2010년 6월 27일, 정리=오세택 기자]
 
 
(10) 루카 복음에서의 성모님 : 하느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어머니
 
우리는 루카복음에서 하느님 말씀에 마음 설레하며 온 힘을 다해 순명하는 성모님을 살펴봤다. 겸손한 자세로 어려운 이들을 배려하며, 모든 일에 지혜롭게 대처하시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런 인격적 모습과 달리 성모님에 대해 허황된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학자나 외경은 원죄의 결과가 출산의 고통인데, 원죄 없으신 성모님은 그 고통을 겪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수님 탄생을 전하는 부분에 직접 언급은 없지만 성모님 역시 모든 어머니가 겪는 출산의 고통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출산의 고통과 노동은 결코 원죄의 결과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는 인간과 모든 동물이 번성하라는 하느님 축복으로 나타난다.
 
출산한 성모님이 나자렛으로 귀향하는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기 예수는 하느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성장 과정을 거친다. 모든 아이가 엄마에게 많은 것을 배워가듯 아기 예수도 배움이 필요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인간적 성장 과정 없이 쑥쑥 자라는 것과 달리 예수님의 성장 과정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소년 시절(루카 2,41-54)을 보면 예수님이 부모를 따라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가는 모습이 나온다. 파스카는 '건너 뛰다'라는 히브리어에서 유래됐다. 원래 유목민의 축제인 파스카는 질병이 자신들이 키우는 가축을 건너 뛰게 함으로써 재산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된 의식이었다. 나중에 모세는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파스카 예식을 이용한다. 이는 노예의 삶에서 자유인의 삶으로 건너 뛰려는 더 발전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훗날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통해 거행하는 파스카 예식은 한층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재산을 지키거나,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현재의 문제가 아닌 유한의 삶에서 무한의 삶으로 건너 뛰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런 파스카 축제에서 헤어진 아들을 애타게 찾던 부모에게 소년 예수가 한 말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성모님의 입장은 어땠을까? 여느 부모 같으면 화를 냈을 텐데, 성모님은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했다. 정말 화가 나도 곰곰이 되새기는 성모님. 소년 예수를 대하는 성모님의 인격적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라는 성경구절을 보면 예수님이 결코 겉만 인간의 모습을 한 하느님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루카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공생활에서의 모습은 마태오ㆍ마르코복음에 겹쳐 나오기도 한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러 왔다는 제자들 말에 각 복음은 어법의 차이를 보인다. 루카복음은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기록했고, 마태오ㆍ마르코복음에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는 표현이 더 나와 있다.
 
그리스 사람인 루카 성인은 철저한 남성 중심, 제자 중심에서 벗어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직접적 표현을 쓰지 않았다. 반면 마태오ㆍ마르코복음은 '누가 내 어머니냐'라는 반문을 뒤에 씀으로써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세상에 어떤 남성과 여성이 아무리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따라도 예수님의 어머니, 아버지가 될 수는 없다. 예수님의 어머니, 아버지는 오직 성모님과 요셉 성인 뿐이다. '내 어머니'라는 말마디는 예수님께서 항상 자신의 어머니인 성모님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다른 복음에는 나타나지 않고 루카복음(11,27-28)에만 나오는 기록을 살펴보자. 군중에게 연설하시는 예수님께 한 여인이 '선생님의 어머니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답하신다. 개신교는 여기 나오는 '오히려'를 예수님에게 젖을 먹인 여인은 행복하지 않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여인으로서 성모님이 갖는 이중적 행복의 의미라 볼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누가 내 어머니고 형제냐?'라는 표현이 어머니 성모님을 무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성모님은 예수님에게 육체적 어머니인 동시에 하느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어머니라는 뜻이다. [평화신문, 2010년 7월 4일, 정리=백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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